[이 작가의 시론] 공산화 위기를 극복한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해 독립전쟁을 벌였고, 1949년 12월에 주권을 이양받아 독립했습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사회주의에 기울며 중국과 친교를 쌓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내각에 포함하며 정치적 힘을 모았습니다. PKI는 1950~60년대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정치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60년대에 수카르노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슬람을 통합하려 했으나 군부와 공산당의 갈등이 팽팽했습니다.

PKI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하는 다른 나라 공산당과 달리 공산당을 포용 내지 이용하는 수카르노 정권과 협력하면서 체제 내 세력 확장을 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체제 내 공산당으로는 세계 제1의 당세를 과시하였습니다. PKI는 중국 공산당과 밀접히 교류하고 후원을 받았는데,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국가 주석 직을 내놓은 이후에는  ‘인도네시아 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PKI에 혁명을 촉구하였습니다.   결국 PKI는 정부 모든 조직과 사회 각 계층에 침투한 자신의 세력을 믿고 군부의 친공 분자들을 동원, 일거에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려 했습니다.

1965년 10월 1일, 육군 주요 인사들이 암살당한 사건(9월 30일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군부는 이를 진압하며 반공주의를 강화했고, 많은 공산당원과 관련자들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습니다. 수카르노의 권력은 약화되고, 수하르토 장군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에서 대대적인 반공정책을 강화하고, 수카르노의 영향력을 급격히 감소시켰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인도네시아의 현대 정치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했으며, 냉전 시기 동남아시아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 사례는 공산주의 세력 확대와 그에 대한 군부의 대응으로 공산화 위기를 극복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친중, 친북 세력이 대통령 선거와 지자체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이기는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인도네시아처럼 극복할 수 있는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이하, 공산화 위기를 극복한 인도네시아 전체 원문


공산화 위기를 극복한 인도네시아

모스 탄은  한국 선거와 한국 고위 공직 모두에 중국 북한의 간첩 침투 공작으로 체제가 전복될 위기라고 진단했다. 이는 정확한 한국 상황 진단이다. 공산당의 침투로 공산화될 위기에 처했으나 군부의 반격으로  극복한 나라가 있다. 바로 인도네시아이다. 대한민국도 유사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인도네시아 사례를 고찰하는 것이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수카르노의 용공 정책 -1

네덜란드는 1826년 파푸아 뉴기니(오늘날의 西파푸아), 1848년 발리, 1849년 보르네오(칼리만탄), 1872년 수마트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거액의 전쟁비용으로 만성적인 재정 위기에 시달렸다. 20세기에 들어서 네덜란드 총독부에 대한 원주민의 봉기는 거의 막을 내렸으나 민중을 교육시켜서 식민통치에 대항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에 자극받은 것이기도 했다. 참정권을 요구하던 이슬람 연합(Sarekat Islam)의 압력에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1918년 별다른 실권이 없는 폭스라드(Volksraad)를 만들었다. 1942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12월 15일 일본군은 브루나이를 침공했고 1942년 3월까지 네덜란드 식민지(현재의 인도네시아) 전역을 점령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욱일승천기를 흔들며 일본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독립시켜 줄 듯하면서 인도네시아인을 이용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지도자 수카르노(Sukarno, 1901~1970)는 일본을 믿고 적극 협조했다.

1944년 9월 7일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일본 수상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시기는 못 박지 않았다. 1945년 5월 인도네시아에 주둔한 16군 사령관 하라다 구마기치(原田熊吉)는 인도네시아 독립조사준비국(BPUPKI)을 만들었다. 수카르노는 의장으로 임명되어 대의원들과 인도네시아 독립 청사진을 논의했다. 8월 7일 인도네시아의 일본 군정(軍政)은 BPUPKI보다 규모가 작은 인도네시아 독립 준비위원회(PPKI)의 성립을 승인했다. 21명으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는 독립 인도네시아 정부의 골격을 짜는 임무를 맡았다. 8월 9일 수카르노 등 PPKI의 수뇌부 3인은 일본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육군 원수의 초청으로 베트남의 달랏에 도착했다. 데라우치는 인도네시아 스스로 독립 준비를 진행할 권한을 수카르노에게 주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수카르노 일행은 14일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의 8월 15일 항복으로 예정일인 8월 25일보다 앞당긴 것이었다. 18일에는 의원 내각제를 가미한 대통령 중심제 헌법이 공포했다. 수카르노가 대통령이 되었다. 10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은 재건을 선언했다. PKI는 1920년 5월 코민테른의 지도로 창당했다. 1926년 식민당국을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네덜란드 정부는 대규모로 파병하여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 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지도하여 4년 가까이 치열한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의 중재로 1949년 8월 헤이그에서 원탁회의가 열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승인했다.  10월 1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12월 27일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주권을 이양받았다. 1950년 4월 13일 인도네시아는 중국을 국가로 승인했다.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지 않은 국가로서는 인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빠른 국가 승인이었다. 8월에는 이른바 1950년 임시 헌법이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단원제 의회의 의원 내각제를 규정했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시킬 권한은 있으나 행정부를 이끄는 권력은 없었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고원 도시 반둥(Bandung)에서 29개국 정상이 모여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개최하였다. 인도의 네루 수상, 중국의 수상 주은래, 수카르노 대통령이 회의를 주도했다. 이 회의에서 평화 10원칙이 채택되고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를 유대로 평화공존을 위한 ‘반둥 정신’이 결실을 맺는 정치 쇼가 벌어졌다.

9월 29일 하원의원 선거가 열렸는데, PKI는 617만여 표(16.35%)를 얻어 257석 가운데 39석을 얻어 제4당이 되었다. 제1당은 843만여 표(22.32%)를 얻어 57석을 얻은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Partai Nasional Indonesia)이었다. 제2당은 인도네시아 무슬림 최고위원회 당(MASYUMI, Partai Majelis Syuro Muslimin Indonesia)으로 790여만 표(20.92%)를 얻어 역시 57석을 얻었다. 3당은 이슬람 계통 정당인 울라마 부활당(NU, Nahdlatul Ulama)으로 695만여 표(18.41%)를 얻어 45석을 얻었다. 이외에 인도네시아 이슬람 연합당(8석), 인도네시아 기독당(8석), 카톨릭당(6석), 인도네시아 사회당(5석) 등 군소 정당도 의석을 얻었다.         12월 15일 임시 헌법이 아닌 영구적 헌법을 만들 제헌의회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에서 9월의 하원의원 선거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주요 정당의 득표 순위와 의석 순위가 유지되었다. PKI는 623만여 표(16.47%)를 얻어 전체 514석 가운데 80석을 차지했다. PNI는 119석, MASYUMI는 112석, NU는 91석을 얻었다.

1956년 3월 4일 인도네시아 하원이 개원했다. 수카르노는 개원 연설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방식의 민주주의를 주문했다.  1957년 2월 수카르노는 ‘개념(Konsepsi)’이라고 명명된 연설을 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가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잘못된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 대안으로 상호 협력 내각을 제안했는데, 이는 선거에서 의미 있는 득표를 한 모든 정당이 내각에 참여하여 서로 협력하자는 말이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인은 모두가 가족임을 역설하며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기에 많은 정치 세력이 혐오하는 정당이지만 600만 표를 얻은 공산당도 반드시 내각에 들어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8월 17일 독립기념일에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전통에 서구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기 때문에 지도자가 이끄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면서, 이 민주주의는 개인, 집단, 정당이 중심이 아니라 국가 중심적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카르노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라 했다.

11월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이 인도네시아를 방문, 수카르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는 총액 2억 2,300만 달러로 전후 배상 문제를 타결했다. 1958년 1월 인도네시아와 일본 정부는 평화조약과 배상 협정을 체결하여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2월 반공 성향인 일부 인도네시아군이 수마트라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 Pemerintahan Revolusioner Republik Indonesia)를 세웠다. 3월 14일 PRRI 반란으로 수카르노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7월 나수티온(Abdul Haris Nasution, 1918~2000) 육군참모총장은 1945년 헌법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제헌의회가 의견이 엇갈려 정족수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는 헌법안을 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군은 1945년 헌법으로 돌아가자는 시위를 조직했는데, 찬성 여론이 많았다. 12월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네덜란드 기업 26개를 국유화했다. 이 과정에서 4만여 명의 네덜란드인을 추방했다.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조치를 환영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수카르노의 용공 정책 – 2

1959년 7월 5일 수카르노는 초헌법적인 대통령령을 발표하여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1945년 헌법을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로 삼을 것을 선언했다. 수카르노는 제헌의회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어 1945년 헌법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실패하자 비상조치를 내린 것이다.  8월 17일 독립기념일의 연설에서 수카르노는 지난 의회민주주의 10년 동안의 시간 낭비가 혁명의 실패를 초래했다면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1945년 체제로 돌아가야 하며 의회가 아닌 대통령이 실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수카르노의 권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PKI는 수카르노를 전폭 지지했다.  1960년 3월 하원이 4년간의 임기를 마쳤다. 수카르노는 대통령이 의원 절반을 지명하는 새로운 의회 체제를 만들었다. 9월에는 최고입법기관으로서 임시국민자문회의(MPRS)를 설치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西 파푸아 뉴기니 문제로 네덜란드와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전쟁을 준비하려고 미국의 문을 두드렸다. 미국이 거절하자 12월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이 모스크바로 가서 25억 달러 상당의 무기 계약을 했다. 원금 상환 이전에 장기간의 거치 기간을 두는 좋은 조건이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해 말 수카르노는 민족주의(Nasionisme : 대표 세력은 군부), 종교(Agama : 이슬람), 공산주의(Komunisme) 3대 세력을 규합하여 나사콤(NASAKOM)으로 불리는 거국일치 체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1961년 4월 수카르노는 미국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케네디 대통령에게 말했다. 소련이 제공한 무기가 네덜란드령 파푸아 뉴기니 주둔 네덜란드 군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만큼 왔다고 본 수카르노는 12월 19일 네덜란드령 西 파푸아 뉴기니 침공을 명령했다. 군사작전 명은 트라코라 작전이라 했고 이를 위해 만달라 사령부를 조직했다. 사령관은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 1921~2008) 준장이었다. 네덜란드령 파푸아 뉴기니를 침공한 인도네시아군의 군사적 성과는 별로 없었으나 미국이 압력을 가해 네덜란드는 협상에 나섰다. 1962년 8월 15일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가 뉴욕 협정이 체결되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서 파푸아 뉴기니 합병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군사가 아닌 정치 외교를 통한 수카르노의 큰 승리였다.

1962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자카르타에서 제4회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실론(스리랑카), 대한민국, 일본, 필리핀, 타이, 버마, 말라야 연방, 北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 홍콩, 베트남 공화국, 캄보디아 등 17개국의 선수 1,460명이 참가하였다. 중공과 우호 관계라 중화민국(대만) 선수단에게 입국 비자를 주지 않았고, 인도네시아가 이슬람 국가이므로 이스라엘 선수단에도 입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였다. 대한민국도 못 오게 하려 했다가 철회했다. 대회가 끝나자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스포츠 경기를 정치와 결부시킨 것을 문책하여 인도네시아의 올림픽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키고, 1964년에 개최되는 도쿄 올림픽 출전을 금지시켰다. 수카르노는 이에 반발하여 IOC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베트남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정치적이라고 말하며 IOC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도구라고 비난했다.

1963년 1월 수카르노는 말라야 연방(Federation of Malaya)의 행위를 신식민주의로 규정하고, 말레이시아 연방을 형성하겠다는 구상을 반대하는 대결 정책(Confrontation Policy)을 펼 것을 선언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지지를 표명하고 경제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인도네시아, 중공, 소련, 파키스탄, 이라크, 캄보디아, 말리 등 10개국이 신흥국 경기 대회(GANEFO, Games of New Emerging Forces)를 창설하기로 했다. 7월 수카르노는 임시국민회의의 뜻에 따르는 형식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나사콤에 대해 쓴 그의 저서들은 각급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해야 하는 교과서가 되었고 신문과 단 하나뿐인 라디오 방송인 국영 인도네시아 라디오 방송(RRI)과 국영 TV 방송국(TVRI)은 ‘혁명의 도구’로서 수카르노의 뜻을 전파하느라 애썼다. 뉴기니섬에 있는 카르스턴즈 피라미드(Carstensz Pyramid)라 불리는 높이 4,884m의 인도네시아 최고봉을 수카르노 봉이라 개명하는 등의 우상화 작업도 벌였다.

수카르노의 권력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어 보였으나, 그의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 두 기둥인 군과 공산당이 반목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위태로웠다. 군과 민족주의자, 이슬람 조직은 수카르노의 비호 아래 급속히 세가 커가는 공산당을 보며 공산화가 임박했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수카르노는 군부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려고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아이딧(Dipa Nusantara Aidit, 1923~1965) 등 PKI 지도부를 내각 등 정부 요직에 여럿 진출시켰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서기장 아이딧과 제2 부서기장 뇨토(Njoto, 1927~1965)는 1962년 3월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다. 뇨토는 1964년 9월 내무 장관에 임명되어 토지 개혁을 맡게 되었다. 제1 부서기장인 루크만(Lukman, 1920~1966)도 내각에 들어갔다. 정권의 비위를 맞추며 세력을 늘리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접근 방식은 무산 계급의 봉기를 추구하여 집권하려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외침 外侵이 아닌 ‘내침 來侵’이라 할 수 있었다.】

9월 말라야 연방이 확대되어 싱가포르, 북보르네오를 통합하는 말레이시아 연방이 되었다. 9월 17일 말레이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와 단교했다.  같은 달 PKI 서기장 아이딧은 다섯 번째로 중공을 방문했다. 모택동 등 중공 수뇌부와 회담하여 두 공산당의 우호 관계를 과시했다. 【1964년 중공의 인민출판사는 아이딧의 연설집인 《인도네시아 혁명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출간했다.】

11월 제1회 신흥국 경기 대회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렸다. 51개국 2,700여 선수들이 참가했다. 신흥국 경기 대회는 올림픽에 대항하는 성격의 대회였다. IOC는 신흥국 경기 대회 출전자는 올림픽 출전을 금지하고 기록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대회 전에 천명했다. 이 대회에서 북한의 신금단(辛今丹)은 육상 400m에서 51초 4의 기록으로, 800m에서 1분 59초 1의 기록으로 세계 신기록을 냈다. 그리고 200m에서도 23초 5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신금단은 1938년 7월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문준(辛文濬, 1915~1983)씨는 1·4 후퇴 때 인민군 징집을 피해 홀로 월남했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신금단을 알아본 신문준은 대한 올림픽 위원회에 연락하여 딸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남북한의 협의로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부녀 상봉을 결정했다. 그런데 IOC가 신흥국 경기 대회에 참가한 신금단의 출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아 김일성은 북한 선수단의 전원 철수를 명령했다. 신문준 부녀는 우에노역에서 7분 정도 만날 수 있었다. 조총련 단원들이 신금단을 끌고 나갔다.】

이 해에 PKI는 농지개혁에 적극 임하는 방침을 채택하고는 ‘농민의 일방적 행동’이라고 하는 과격한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전위 조직인 인도네시아 농민전선(Barisan Tani Indonesia)가 지도하여 미사용의 국유지, 부재지주의 농지를 농민이 일방적으로 점유하도록 했다. 이 해 인도네시아 공산당 제7차 중앙위원회 제1·2회 확대회의에서 서기장인 아이딧은 무장투쟁 노선으로의 전환을 분명히 했다.

1964년 수카르노는 반미 反美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부 관리들은 미국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보유하고 있는 여러 이권을 비난했고,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도 미국 서적과 비틀즈의 앨범을 거리에서 불태웠다. 미국 영화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인도네시아 밴드 쿠스 플러스(Koesu Plus)는 미국 로큰롤을 연주했다고 반역자로 몰려 옥살이를 했다. 이에 미국 정부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자, 수카르노는 “Go to hell with your aid.”라고 응대했다. 1964년 10월 중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모택동이 지원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음모 – 1

1965년 1월 초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아 말레이시아가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되자 수카르노는 격분하여 7일 유엔 탈퇴를 선언하였고 신흥 세력을 규합하여 제2의 유엔 격인 “신흥국 세력 회의(CONEFO, Conference of New Emerging Forces)”를 창설할 것을 제창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열렬히 지지하였는데, 『인민일보』는 1월 10일 자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 인도네시아가 유엔을 탈퇴한 것은 정의롭고도 정확한 혁명적 행동이다. 우리 정부는 단호히 수카르노 대통령의 과감한 결정을 지지한다. ━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유엔이 자행하는 악행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수카르노는 유엔이라는 이 호랑이의 꼬리를 밟음으로써, 유엔에 대한 미신을 타파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6억 5천만 중국 인민은 1억 4천 만 인도네시아 형제자매들과 함께 궐기하여,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손잡고 전진할 것이다.

1월 13일 미국 CIA는 수카르노가 우익 지도자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문건을 공개했다. 내용은 수카르노가 PKI를 이용하고 버릴 소모품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내 적이 될 수도 있소. 그건 당신들이 정할 일이요. 오늘 나에게 당면한 눈앞의 적은 말레이시아입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언젠가 때가 오면 PKI도 정리할 것이오. 단지 지금은 그때가 아닐 뿐이오. 수카르노의 말은 진심일까? 우익 지도자에게 하는 립서비스였는가? 수카르노와 PKI를 이간하려는 CIA의 공작이었을까?

1월 하순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겸 정보부장 수반드리오(Subandrio, 1914~2004)가 중국을 방문해서 군사 분야에 관한 일련의 회담을 했다. 비슷한 시기, 인도네시아 공산당 서기장인 아이딧은 농민과 노동자를 무장시켜서 이른바 제5군을 창설할 것을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적극 권유하고 있었다. 이때 인도네시아는 육군·해군·공군·경찰군의 4군 체제였다. 육군 32만, 해군 4만, 공군 3만, 경찰군 11만, 그리고 지방의 치안유지군 10만이 있었다. 해군과 공군은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소련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제5군은 노동자·농민을 주체로 하는 인민군(Peopl’s Army)이라 할 수 있다. 아흐맛 야니(Ahmad Yani, 1922~1965) 육군장관 겸 육군 참모총장과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 겸 3군 참모총장은 제5군이 공산당의 사병을 양병하는 일이라며 거부했다. 1965년에 들어서 노동자들도 미국 기업이 소유한 고무 농장과 석유 회사들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약탈했고 경찰과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2월 7일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다. 같은 달 인도네시아 군사 사절단이 북경을 방문했는데, 수상 주은래는 제5군 설립을 화제로 삼았다.

4월 자카르타에서 반둥 회의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48개국 대표가 참가했다. 대통령 관저에서 수카르노, 주은래, 일본 자민당 부총재 가와지마 쇼지로(川島正次郞)의 3자 회담이 열렸다. 이때 일본 정부는 5월 도쿄로 수카르노와 라만(Tunku Abdul Rahman, 1903~1990) 말레이시아 수상을 초대하여 화해시키려 하고 있었다. 회담의 주제는 ‘말레이시아 대결 정책 문제’, 중일 관계의 개선 문제, 일본과 인도네시아가 베트남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나서는 문제 등 셋이었다. 주은래는 ‘말레이시아 대결 정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나머지 둘은 반대했다.

회담 후 가와지마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화해를 위한 중재 역할을 맡아 쿠알라룸푸르로 떠났다. 주은래와 중공 외교부장 진의(陳毅)는 자카르타에 남아 도쿄에서의 협상에 참여하지 말라고 계속 수카르노를 설득했다. 수카르노는 주은래에게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는 위기이며 경제 위기는 절정에 이르러 파산 직전, 게다가 국내 치안은 더욱 좋지 않다고 말했다. 【수카르노가 국내외 정치에만 신경을 쓰고 경제를 소홀히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정부가 군비를 충당하려고 돈을 찍어내니 1964~65년 사이 인플레이션은 600%에 이르렀다.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대규모 플렌테이션의 쇠퇴와 밀수가 성행하여 외환 부족에 시달렸다. 인도네시아는 서방과 공산권에서 끌어들인 차관을 상환하기 어려워 모라토리움이 임박했다. 사회간접자본에 투입할 예산이 없어 도로, 철도, 항만 등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독립의 일등 공신인 군대도 부정부패가 만연해 신망을 잃어갔다. 수카르노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급격히 내려가 바닥 수준이었다.】

주은래는 두 가지 선물을 주겠다며 설득했다.  ‘첫째, 인도네시아가 경제난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중국은 인도네시아에 5천만 달러의 긴급원조를 제공한다. 둘째, 치안 문제 해결을 위해 인도네시아는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켜 제5군이라는 인민군을 창설하여 육군과 그 밖의 반대파 세력에 대항하게 한다. 인민군의 무장을 위해 중국은 5개 사단 정도의 병력 편성에 상응하는 무기를 인도네시아에 인도한다’ 4월 말 고민한 끝에 수카르노는 주은래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쿄에서 말레이시아와의 회담에 불참한다고 천명했다. 이는 일본의 중재를 지원하던 미국과 영국의 신뢰를 잃는 일이었다.

5월 17일 수카르노는 군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5군의 창설을 공식 촉구했다.  5월 23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창당 45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PKI는 소련과 중국 공산당 다음으로 가장 큰 공산당 조직을 보유했다. 전국적으로 350만이 넘는 당원에 청년 행동대원 300만 명이 있었고 조직원 350만 명인 노동조합과 회원 900만인 인도네시아 농민전선도 PKI가 통제했다. 이외에 여성 운동과 문인 단체, 예술인 단체를 고려하면 PKI는 2천만 명이나 되는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의회에서도 상당한 의석을 보유한 제3당이었다. 그리고 PKI는 모든 정부 기구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인도네시아군은 PKI와 연계된 좌파와 미국이 기대를 거는 우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5월 29일 수반드리오 외무장관 겸 정보부장이 길크라이스트(Andew Graham Gilchtist, 1910~1993) 인도네시아 주재 영국대사가 썼다는 편지를 공개했다. 길크라이스트가 영국 외무부에 보내는 것으로 ‘현지 군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과 영국이 힘을 합쳐 인도네시아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수카르노는 군을 더욱 의심했다. 【훗날 서방측에 귀순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작원 라디슬라프 빗만(Ladislav Wittman)은, 이 서신이 인도네시아 군부의 반공주의 강경파 장군들을 끌어내리려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요청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정보국에서 위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5월 말 이집트 카이로에서 주은래, 수카르노,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등 네 나라의 정상이 만나 단결을 과시했다. 이들은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개최될 제2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개최 예정일 직전인 6월 19일 알제리에서 부메디엔(Houari Boumédiènne) 국방부 장관이 주도하여 무혈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벤 벨라(Ben Bella) 대통령을 축출했다. 이 일로 제2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는 연기하기로 결정이 났는데, 실제로는 유회(流會)였다. 8월 3일 수카르노 대통령은 갑자기 쓰러졌는데, 의료진은 관상동맥 부정맥으로 진단했다. 이는 제2회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취소되어 실의에 빠져 일어난 일이었다.  8월 4일 모택동은 인민대회당에서 서기장 아이딧이 인솔한 인도네시아 공산당 대표단과 회견했는데, 국내의 계급투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PKI 대표단은 모택동에게 이번 방문 기간에 무장투쟁과 농민운동의 경험을 배웠다고 말했다.

8월 5일 모택동은 인민대회당에서 PKI 대표단과 국가주석 유소기, 국무원 총리 주은래, 국무원 부총리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등소평(鄧小平, 1904~1997), 베이징 시장 팽진(彭眞, 1902~1997), 외교부장 진이, 강생(康生) 등과 동석하여 회견했다. 8월 7일 수카르노가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소식을 주은래로부터 전해 들은 PKI 서기장 아이딧은 특별기를 타고 급거 귀국했다. PKI의 뒷배는 나사콤 체제를 표방하는 수카르노였다. 수카르노는 PKI를 후원하고 중국 공산당과도 긴밀한 관계였다. 육군의 주류는 이러한 수카르노를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수카르노는 좌우 양쪽의 여러 세력에 의한 정치 균형 위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쓰러진다면 PKI의 운명은? 아이딧은 공산 혁명 시나리오를 모택동에게 털어놓았고 그에 대한 조언까지 들었다. 모택동은 큰 기대를 걸었다. 【모택동은 친중인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일본 공산당에게 ‘권력을 탈취할 기회가 있다면 언제라도 무장투쟁을 위해 들고 일어나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지시하였다.】

모택동이 지원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음모 – 2

8월 17일 수카르노는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인도네시아가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정권들과 반제국주의 동맹을 맺을 것이라며, 자카르타 – 프놈펜 – 하노이 – 베이징 – 평양이 축이 되는 새로운 아시아 블록이 형성되었다고 했다. 또한 군은 절대 정치에 간여하지 말라며, 제5군 창설을 승인했음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8월 22일 여러 이슬람 반공 단체를 지지하는 야니 육군장관 겸 육군 참모총장은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공산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의 국정 개혁을 건의했다.  9월 13일 아이딧은 ‘지금의 혁명 정세를 정점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이례적인 발언을 했다. 이에 인도네시아 화폐인 루피아는 급락하고 쌀값이 급등했다. 자바섬의 여러 도시에서 쌀을 달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장군 평의회가 군사혁명을 일으킬 것 같다는 소문이 퍼졌고 수카르노를 경호하는 짜크라비라와 연대(Tjakrabirawa Regiment)의 대대장인 운뚱(Untung bin Syamsuri, 1926~1967) 중령은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 자바섬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분위기에 휩싸였다.【대통령과 그 가족을 경호하는 짜크라비라와 연대는 1962년 6월 창설되었다. 인원은 육군, 해군, 공군, 경찰군 모두에서 충원되었다. 5개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통령을 직접 경호하는 부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10월 1일 새벽, 6인의 고위 장군이 납치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9월 30일 운동’이라 한다. 행동이 9월 30일 밤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흐맛 야니 육군참모총장의 집은 보통 11명의 군인이 보호했는데, 사건 일주일 전 6명이 증원되었다. 이 증원병들은 라티예프(Latief) 대령의 부대에서 왔는데, 라티예프는 9월 30일 쿠데타 주역 가운데 일인이었다. 이들 6명은 9월 30일 밤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 9시경부터 경비조에게 뭔가를 묻는 전화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왔다. 야니 장군은 9월 30일 저녁 7시경 최고 작전사령부에서 나온 한 대령과 동부 자바 사단장 바수끼 라흐맛(Basuki Rahmat) 장군을 만나고 있었다. 바수끼는 동부 자바에서 고조되는 공산당 활동을 보고했다. 야니는 다음 날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바수끼와 같이 들어가기로 했다.

10월 1일 3시 15분경 운뚱 중령은 군 수뇌부인 7인의 장군 –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야니 중장, 제1 육군 참모차장 파르만(Parman) 소장, 제2 육군 참모차장 수프랍토(Suprapto) 소장, 제3 육군 참모차장 하르요노 소장, 육군 참모본부 제4 차관보 판자이탄(Pandjaitan) 준장, 군 검찰총장 수토요(Sutoyo) 준장 – 을 납치하려고 트럭과 버스로 7개 분견대를 보냈다. 이들은 자카르타 근교의 할림 페르다나쿠수마(Halim Perdanakusuma) 공군 기지에서 출발했다. 이 일곱 분견대의 병력은 짜크라비라와 연대, 디포네고로 사단(중부 자바 관할), 브라위자야 사단(동부 자바 관할) 소속이었다.

새벽 200여 명의 군인들이 야니 장군의 자택을 겹겹이 포위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급히 부른다며 현관문 앞에서 야니를 독촉했다. 이른 새벽의 이례적 호출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야니 장군은 일단 따라가기로 했다. 먼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병사들은 막으며 잠옷을 입은 채로 따라나서라고 요구했다. 야니는 격노하여 버릇없는 병사의 뺨을 때렸다. 이때까지도 야니 장군은 그들이 반란군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돌아서자 반란군 병사 하나가 소총으로 쏘았다. 현관 유리를 관통한 총탄이 여럿 야니 장군의 등에 박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반란군 병사들은 야니 장군의 시신을 트럭에 싣고 할림 페르다나쿠수마흐 공군 기지 바로 남쪽에 있는 마을인 루방 부아야(Lubang Buaya)에 있는 반란군 본부로 향했다.

판자이탄 준장 자택을 습격한 반란군은 1층의 사환들과 격투를 벌여 한 명을 사살했다. 반란군이 가족을 인질로 삼자 판자이탄 준장은 정복 차림으로 2층에서 내려와 반란군과 대치했다. 타협의 여지가 없자 권총을 뽑아 들었으나 반란군의 총탄이 판자이탄의 머리를 깨트렸다. 반란군은 시신에 몇 차례 더 총질한 다음 트럭에 싣고 루방부아야로 옮겨갔다. 하르요노 소장은 반란군과 대치하다가 일제 사격에 사살되었다. 반란군은 시신을 트럭에 싣고 루방부아야의 반란군 본부로 갔다.

새벽 4시경 반란군의 나수티온 체포조가 트럭 4대와 지프차 2대에 나누어 타고 평범한 단층집인 나수티온 장군의 자택에 도착했다. 아립(Arief) 중위가 이들을 지휘했다. 초소에 있던 20명 정도인 경비병들은 군용 트럭의 접근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는데, 나수티온의 부관 피에르 텐데안(Pierre Tendean) 중위와 함단 만슈르(Hamdan Masjur) 경위는 마침 잠이 들었다. 체포조 병사들은 경비병을 제압하고는 15명 정도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나수티온 부부는 모기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밖이 소란하여 부인이 문밖을 내다보았는데, 반란군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급히 문을 닫으며 나수티온에게 위험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나수티온이 직접 상황을 알아보려고 문을 열자 반란군은 총격을 시작했다. 나수티온이 급히 문을 닫고 그의 부인이 자물쇠를 잠갔으나, 반대편으로 들어온 반란군이 침실을 향해 발포했다. 반란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나수티온은 뒤쪽 정원으로 나가 이라크 대사관저와 접한 담으로 달려갔다. 반란군 병사들이 사격했으나 빗나갔다. 나수티온은 담을 넘다가 발목이 부러지면서 대사관 마당으로 떨어졌다.

한집에 살던 나수티온의 가족은 총소리에 놀라 모두 일어났다. 나수티온의 모친과 여동생 마르디아(Mardiah)는 나수티온의 침실로 들어가 5세인 나수티온의 막내딸 이르마(Irma)를 안고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총탄이 문을 뚫고 날아와 마르디아의 손을 관통했고, 어린 이르마는 세 발의 총탄을 맞아 척추가 부서졌다. 나수티온의 장녀인 13세의 얀티(Janti)와 유모 알피아(Alfiah)는 부관들이 쓰는 별채의 침대 밑에 숨어 위기를 넘겼다. 부관 피에르 텐데안 중위는 총소리에 깨어나 권총을 장전하고 별채에서 뛰어나왔지만 몇 걸음 못가 반란군에게 잡혔다. 어둠 속에서 반란군은 그를 나수티온 장군으로 착각했다. 나수티온의 부인은 뒤뜰에서 돌아와 피투성이가 된 어린 막내딸을 안고 전화로 구급차를 부르려 했다. 아립 중위가 저지하며 나수티온 장군의 행방을 집요하게 물었다. 나수티온의 부인은 그가 며칠간 일정으로 외출했다고 말했다. 호루라기 신호가 울리자 반란군은 오인 체포한 텐데안 중위를 트럭에 태우고 신속히 철수했다.

수프랍토 소장은 치통에 시달려 자택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 급습을 당했다. 짜크라비라와 부대원인 반란군은 대통령으로부터 급한 소환이 있다며 수프랍토의 동행을 요구했다. 그는 범죄자처럼 루방부아야로 끌고 갔다. 수토요 준장은 집 안에 들어온 반란군이 대통령의 호출이라고 하자 이를 믿고 차에 올라 루방부아야로 갔다. 새벽 4시 10분경 파르만 소장 부부는 집 주변의 소란함에 잠이 깼다. 그의 자택을 지키는 경비병은 한 명도 없었다. 24명의 짜크라비라와 부대원이 응접실로 들어와 중대 사태가 벌어졌으니 대통령을 만나러 가자고 강권했다. 납치된 세 장군과 페르안 텐데안 중위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반란군은 이들 7명의 시신을 폐기된 우물에 버렸다.

모택동이 지원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음모 – 3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은 이라크 대사관의 화단에 숨어 있다가 아침 6시에 부러진 발목을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부관이 모는 차를 타고 국방부로 갔다. 국방부에서 나수티온은 반란을 진압할 병력을 보유한 수하르토 육군 전략 예비 부대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내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나수티온은 수하르토 소장에게 수카르노 대통령을 찾으라고 명령했고, 마르타디나타 해군 사령관, 하르토노 해병대 사령관, 유도디하르조 경찰총장에게 자카르타로 들어오는 모든 육로와 해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공군 사령관 오마르 다니가 반란의 동조자라는 정황이 분명하여 공군에는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  육군 전략 예비 부대(Kostrad, Komando Cadangan Strategis Angkatan Darat) *
1961년 3월 부대가 창설되었고 수하르토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처음 이름은 육군 일반 예비 부대(Cadangan Umum Angkatan Darat)였으나 1963년에 육군 전략 예비 부대가 되었다.

반란군은 라디오 방송국과 자카르타 방송국, 그리고 독립 광장(Medan Merdeka)을 점령했다. 대통령 관저인 이스타나 메르데카(Istana Merdeka : 독립 궁전)는 정체불명의 반란 부대에 포위되었다. 아침 7시 10분 무렵 운뚱 중령은 CIA와 공모하여 국가전복을 시도한 장군들을 체포, 제거했고 수카르노 대통령과 국가를 보호한다는 성명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했다. 수카르노는 9시 30분 무렵 관용차를 타고 이스타나 메르데카에서 할림 공군 기지로 갔다. 푸른색 승용차가 뒤를 따랐다. 수카르노는 검찰총장 수나리오와 함께 공군작전사령부 건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마르 다니 공군 사령관, 레오 와티메나 장군 등과 만났다. 이들은 수카르노에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곧이어 수파르조(Supardjo) 준장, 수퍼노 소장, 수키모 소령 등 3인이 도착했다. 만달라 전투 사령관 수파르조 준장은 홀로 수카르노를 만나서 PKI 서기장 아이딧도 할림 공군 기지에 와 있음을 알렸다. 수파르조는 수카르노에게 쿠데타 승인을 요청했다. 수카르노는 강력히 거절하며 즉시 전투 행위 중지를 명령했다.

수카르노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아흐맛 야니 중장, 수하르토 소장, 해군 사령관, 경찰총장, 위라하디수쿠마 자카르타 수비대장 등이 모이는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장소는 대통령 전용기 조종사인 수산토 공군 대령의 자택이었다. 수하르토와 위라하디수쿠마가 불참한 가운데 수산토 대령의 자택에서 수카르노가 소집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수카르노는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프라노토 렉소사모드라(Pranoto Reksosamodra, 1923~1992) 소장을 아흐맛 야니 후임의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회의를 마친 수카르노는 할림 공군 기지로 돌아갔다. 오전 11시 육군 특수전 연대(RPKAD : Regimen Parakomando Angkatan Darat) 사령관 사르워 에디 위보어(Sarwo Edhie Wibowo, 1925~1989)가 육군 전략 예비 부대 사령부에 도착했다. 대령인 위보어는 야니 육군참모총장이 아끼는 고향 후배였다. 야니의 죽음에 그는 결사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생각이었다.

12시 정오 운뚱 중령은 내각 해산을 선언하고 혁명 대표부가 발족하여 내각을 대신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오후 2시경 수카르노가 반란군에게 납치되어 할림 공군 기지에 잡혀 있다고 판단한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은 수하르토와 해군 사령관, 해병대 사령관, 경찰총장에게 대통령 구출과 자카르타 치안 회복을 명령하고는 수하르토를 이 작전의 지휘관으로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수하르토는 사르워 에디 위보어에게 6시를 기해 국영 라디오 방송국과 자카르타 방송국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사르워 에디는 6시 예정대로 육군 특수전 연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방송국을 장악했던 반란 부대가 대부분 할림 공군 기지로 철수했으므로 별다른 저항 없이 30분 만에 목표 건물들을 접수할 수 있었다. 이어서 1)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이 운뚱 중령이 주도했던 반란을 분쇄했다.  2) 수카르노 대통령도 무사하고 건강하다.  3) 반란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고 있다.  4) 혁명 대표부 분쇄는 수하르토가 담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

오후 6시 대통령 관저를 포위했던 군부대들이 할림 공군 기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이들의 기지 진입을 불허했다. 측근들은 또 다른 대통령 관저인 이스타나 보고르(Istana Bogor : 사탕야자 궁전)으로 가서 추이를 살펴보자고 했으나 수카르노는 프라노토 육군참모총장 내정자의 도착을 기다려 보자고 했다.                       밤 8시 밤방 위자나르코가 할림 공군 기지에 도착해서 프라노토가 육군 전략 예비 부대 사령부에 와 있지만 수하르토의 반대로 할림 공군 기지로 올 수 없다고 수카르노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수하르토가 육군의 실권을 쥔 상태인 것도 알렸다.

수하르토는 할림 공군 기지에 모인 반란군 수뇌부에 투항하지 않으면 곧 공격하겠다고 통보했다. 밤 10시 30분 무렵 수카르노 일행은 할림 공군 기지를 떠나 이스타나 보고르로 향했다. 이 일은 곧 수하르토에게 보고되었다. 수카르노는 자정이 넘어 이스타나 보고르에 도착했다. 10월 1일은 중국의 건국 기념일이기도 하다. 이때 북경에는 500명에 이르는 인도네시아 우호대표단이 집결해 있었다.  10월 2일 오전 2시 사르워 에디 위보어는 육군 특수전 연대를 지휘하여 할림 공군 기지를 공격했다. 가벼운 교전 끝에 6시 할림 공군 기지를 장악했다. 수카르노가 떠나니 혁명군이라 자임했던 반란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이로써 군사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날 진압군은 PKI 기관지 『하리안 라캿(Harian Rakyat : 인민일보)』을 발행금지시키고 각종 용공 성향의 언론매체를 폐쇄했다. 아이딧은 쿠데타가 실패했음을 알고는 중부 자바 지역으로 잠입하여 솔로를 거점으로 무장투쟁을 재개했다. 10월 3일 여섯 장군과 텐데안 중위의 처참한 시신이 루방부아야의 한 폐우물에서 발견되었다. 이날 PKI 서열 4위인 자카르타 지구 서기장인 뇨노(Njono, 1925~1968)가 체포되었다. 자백서를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5년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정권 탈취를 위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중앙정치국은 아이딧을 의장으로 하여 군사작전의 실시를 결의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건강 문제, 장군 평의회가 그들의 반공 쿠데타 계획을 앞당길 가능성이 있다는 군사작전 결행의 이유였다. 전술이 불충분하여 군사작전이 실패했다. 군사 훈련은 할림 페르다나쿠수마흐 공군 기지 인근의 뽄독거데 루방부아야에서 했다.

10월 5일 살해당한 군인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날부터 참혹한 이들의 시신이 신문과 TV 방송에 공개되어 인도네시아 국민이 격분하였다. 자카르타 주재 각국 대사관은 장군들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기를 걸었는데, 중국 대사관과 쿠바 대사관만이 이를 거부했다. 10월 6일 병원에서 치료받던 나수티온의 막내딸 이르마가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이 지원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음모 – 4

10월 7일 자카르타 시내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규탄하는 데모가 일어났는데, 이슬람 청년단·이슬람 학생연맹은 PKI 본부에 불을 질렀다. 시위 군중은 인도네시아 노동조합 중앙조직·인도네시아 농민전선·인도네시아 부인 운동·인민청년단·인민문화연맹·인도네시아 학생 운동·인도네시아 과학자 협회 등 여러 단체의 건물을 부수었다. 이외에 공산당 관련 학교와 서점이 습격받았다. 시위 군중은 행진하다가 미국 대사관 앞에서 ‘아메리카 만세’를 외쳤다. 거리에는 빨갱이를 죽이라는 고함소리가 난무했다.【반공을 외치는 대학생들이 정변 진압 직후 인도네시아 대학생 행동 전선(KAMI, Kesatuan Mahasiswa Indonesia)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해체를 요구했다.】

10월 8일 자카르타에서 중국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무렵 자바의 화교(華僑) 상점 200여 곳이 약탈당했다. 수마트라에서도 친중친공적인 화교 상점, 중국계 학교와 단체가 습격받아 2, 3백 명이 죽임을 당하고 수천의 화교가 집을 빼앗겼다. 술라웨시와 발리에서도 화교 박해가 진행되었다. 【이때 중국 국적의 화교는 1,134,420명으로 1954년보다 100만 명 정도가 감소했다. 인도네시아 국적의 화교는 230만 명 정도로 전체 화교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그리고 중화민국(대만) 여권을 소지한 이가 1,252명이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화민국을 승인하지 않아 이들은 실제로는 무국적자였다. 당시 화교가 인도네시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 정도였다. 화교가 인도네시아 경제를 지배하므로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화교를 싫어하고 배척했다. ‘9월 30일 운동’ 이후에는 화교가 중국 간첩으로 지목되어 화교 박해가 심해졌다.】

10월 11일 반란 주도자 운뚱 중령이 중부 자바에서 체포되었다. 이날 소련 공산당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고, 수카르노 대통령의 질서 회복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소련은 중국 편향의 수카르노가 비동맹중립주의로 복귀하기를 바랬다. 10월 14일 시위대는 인도네시아 화교들이 세운 레스 푸블리카 대학(Universitas Res Publica)을 습격하여 불태웠다. 반공 시위는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공산당원으로 지목된 자들에 대한 검거와 심문·살해가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10월 15일 수카르노는 수하르토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의 강권에 따른 것이었다. 11월 22일 아침 아이딧은 솔로 근교 마을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조사를 받은 뒤 곧 처형되었다. 그의 자백서가 전한다.  [변호인도 증인도 없는 감금 상태에서 작성되었으므로 이 자백서를 의심하기도 한다.] 자백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쿠데타의 목적과 책임에 대해서) 내 자신이 인도네시아 공산당 주도하에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서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 방침이었다.  (계획과 실행에 대해서) 처음에는 1970년을 목표 시점으로 삼았지만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조기에 결행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1965년 6월 이후로 운뚱 중령 등과 협의를 진행하였고, 인민청년전선과 인도네시아 여성운동 연합 등의 행동 조직을 자카르타 근교의 할림 공군 기지에 집결시켜 훈련을 행하였다. 8월에 중국의 베이징에 들러서, 중국 공산당 수뇌부와 수카르노 대통령의 건강 상태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귀국하고 난 직후에 운뚱 중령 등과 쿠데타의 실행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는데, 육군에게 그러한 움직임이 발각될 우려가 있었던 관계로 계획을 앞당겨서 9월 30일에 결행하기로 했다.

내 자신이 최고 책임자가 되지 않고 운뚱을 혁명 대표부 의장에 앉힌 것은 어디까지나 성공 가능성을 배려한 잠정적인 조치였다. 수카르노 대통령에게는 혁명 평의회를 설치하는 법안을 받아낼 방침이었지만 거부당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 수카르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위를 보전해 주면서도 빤짜실라(pancasila : 다섯가지 원칙)에 관해서는 그 이용도를 점차 줄여서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기존의 4군과는 별개로 제5군을 편성할 방침이었다. (실패와 자아비판에 대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 간부 내에서조차 반대하는 이가 적지 않았고, 중국 등의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이 적었으며, 육군 내부에 침투시켜 놓았던 인도네시아 공산당 세력이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반공적인 육군 세력의 소탕 작전이 너무 빨리 시작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시기상조였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실패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 결행했을 때에 나 자신은 자카르타에서 지휘를 맡고, 할림 공군 기지에서 수카르노에 대해서 장군 평의회의 존재와 그들의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진언을 했지만 수카르노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카르타에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것을 이어받아서, 중부 자바에 혁명 평의회를 다시 설치하여 혁명 세력의 온존과 회복을 도모하기로 하고, 나 자신은 욕야카르타(Yogyakarta)에서 솔로로 향하였다. (재기를 도모한 일이 실패한 것에 대해서) 솔로에서 10월 23일에 총궐기할 예정이었지만 육군의 소탕 부대가 진주해서 권력을 장악했던 관계로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나 자신도 체포되었다.

【일본 공산당 서기장 미야모토 겐지(宮本治, 1908~2007)는 무장투쟁 문제로 아이딧과 의견을 나눈 일이 있다. 미야모토는 모택동에 심취해 있던 아이딧은 곧장 행동에 옮기려는 듯 의욕이 넘쳐났다고 증언한다. 미야모토 겐지는 2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무산된 후 망동을 일삼던 모택동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등 떠밀어 권력 탈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했다고 보았다. 나중에 모택동은 일본 공산당 관계자에게 실패를 PKI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PKI는 ‘수카르노를 맹신하고, 군 내부에 있어서 당의 세력을 과신했으며’, ‘동요하면서 최후까지 싸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11월 24일 모택동은 외국 빈객들 앞에서 세계 정세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최근 세계 정세에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은 금년 2월의 미국의 북베트남 공중 폭격과 금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에 걸쳐서의 인도네시아 사변(事變)이다. 최근 몇몇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미국의 학생 데모. 또 하나는 인도네시아 우파 세력이 발동한 반혁명 쿠데타.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아주 좋아 보이다가도 갑작스레 온통 캄캄해지고 마는 듯이 보일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의 정책이 올바르고, 추구하는 바가 올바르기만 하다면 인민들은 점차 눈을 뜨게 되어, 우리와 함께 들고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소련의 흐루쇼프 같은 인간이 몇 명이 있든, 인도네시아 우파가 아무리 기세등등하게 창궐하더라도 인민 혁명의 국면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인민이 승리를 거두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 하는 것 뿐이다.

1965년 12월 10일 나수티온 국방부 장관은 이번 반란을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의한 ‘9·30 운동(Gerakan 30 September)’이라고 규정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철저한 박멸을 호소했다. 그리고 외국의 지원을 빌어서 반란을 시도하려 했다고 말해, 중국이 배후라는 점을 암시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반란 이후 1년 동안 이슬람계 청년 조직 등 풀뿌리 민중이 공산당원이나 관련자를 대량으로 처형했다. 정부 발표로는 사망자가 8만 9천인데, 적어도 30만 이상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1966년 4월 16일 중국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 자워토(Djawoto, 1906~1992)는 미국 CIA의 대리인이 인도네시아 정치를 우경화하고 커다란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다고 수하르토를 비난하면서 중국에 망명했다.  7월 2일 인도네시아 대학생 행동 전선은 자카르타에 있는 중국 신화사 통신사의 지국을 점거했다.  10월 16일 무장한 인도네시아인 100여 명이 자카르타의 중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대사관원을 폭행했다. 이들은 “베이징으로 돌아가라” “찌찌(cici : 중국인에 대한 멸칭)는 인도네시아에 살 권리가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때 인도네시아 주재 대리대사 요등산(姚登山)은 온몸을 던져 맞섰다. 이윽고 강제 추방되어 돌아오자, 베이징 공항에 정무원 총리 주은래, 문화혁명 소조 고문 강생, 정치국 상무위원 진백달(陳伯達) 등 정부 요인과 홍위병 등 7천 인파가 나와 그를 맞이하였다.

1967년 10월 1일 반공을 외치는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이 자카르타의 중국 대사관을 습격하고 중국 외교관 20명을 구타해 부상을 입혔다. 이들은 중국과의 국교를 단절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유엔 총회에 참석한 말리크 인도네시아 외무부 장관은 급거 귀국해 앞으로의 대중국 외교 문제를 검토했다.  10월 9일 인도네시아 외무부는 베이징으로부터 모든 외교관원을 철수시키며 양국 간의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한다고 중공에 통고하는 코뮤니케를 공표했다. 말리크 외무부 장관은 베이징 주재 인도네시아 외교관 8명이 연금당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들이 무사히 귀국할 때까지 자카르타 주재 중국 외교관들을 억류하겠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부상을 입은 외교관을 철수시키기 위한 중국 전용기가 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인민일보』는 인도네시아가 美帝蘇修反華(미제소수반화 : 중국에 반하는 미 제국주의와 소련 수정주의)의 앞잡이로서의 추악한 본성을 드러냈다고 맹비난했다.

작성자 이 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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